인천 연안 부두에서 배를 타고 4시간을 들어가면 서해안 최북단에 위치한 남한보다 북한이 더 가까운 섬 백령도에 도착할 수 있다. 본래 황해도 옹진군에 속했던 섬은 심청이 몸을 던진 인당수와 2010년 천안함의 침몰과 넋을 기리는 위령비가 망향하는 곳이기도 하다. 안개와 풍랑이 험하고 남북 긴장에 따라 뱃길이 쉬이 닫히는 이곳에 가기 위해 안보미는 몇 차례 날을 기다려야 했다. 올해 여름에 열린 개인전 <죽어도 썩지 않는다.>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작가는 작업의 무대를 인도네시아에서 한국의 서해안으로 옮겨간다. 통영과 사모아, 하와이, 인도네시아를 누비며 아시아와 태평양의 원시 문명과 종교를 탐색하던 작가는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에 대한 관심을 확장하여 군사적 목적이 주민의 생활을 통제하는 지역에서 자연과 원시공동체가 국가와 부딪히는 경계지점을 발견하고자 걸음을 옮겼다.
식민과 냉전의 그늘은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가. 아니, 얼마나 곳곳에 손을 뻗고 있는가. 자본주의가 강하게 작동하는 도시를 벗어난 작가는 서해안의 끝에서 자생문화와 원시공동체를 만나길 고대하지만 오히려 변방은 국가의 경계선으로 작동하며 섬의 시간은 철저히 군사 목적에 맞춰 굴러가고 있었다. 바다 양식이나 관광업이 불가한 해양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답고 다종의 자연 생태가 보고 되지만 인간 공동체는 국가의 통제 아래 있으며 군이 주둔한 자리는 검게 땅을 파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 <제자리 실향 Exiled in their own place>은 태어난 제자리에서 자신의 고향-장소를 상실한 생령(生靈)들의 이야기이다. 현세의 경계 너머 몸 잃은 혼령의 자리함이오 태어난 땅에 새겨진 생동이 후대를 향해 제자리를 일러주는 존재함을 작가는 제 몸으로 교통(交通) 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장의 벽면을 차지할 움직이는 작가의 모습은 언뜻 해변의 표류물과 쓰레기를 수거하는 비치코밍(Beachcombing) 처럼 보이기도 한다. 해변을 따라 속히 걸음을 옮기며 파도가 실어 나른 조개껍질과 해조류, 플라스틱과 비닐 더미를 헤집어 자신이 선별한 물체들을 햇볕으로 기록해 나가는 그의 걸음은 수도자도 모험가도 아닌 무언가를 잃은 자의 것처럼 보인다. 이런 답사 방식은 대게의 예술 리서치처럼 사전적 실험이나 민족지적 연구를 따르기 보다 그 장소의 생동을 자신의 몸으로 확인하여 연결을 감각하는 행위가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장소가 내포한 갈등과 아이러니를 사실적으로 전달하기 보다 자신이 감각한 심상을 통해 다발적으로 발생한 생각과 질문을 이미지로 풀어 내고 있다.
  식민의 유산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한국에서 자신의 근원적 정체성을 외면하고 승자독식의 경쟁과 모범적인 아시아인으로 세계 자본시장에 편승 하기를 종용할수록 지금의 우리는 영원히 나고 자란 나의 땅과 화해할 수 없는 분열증적 심리질환을 앓게 된다. 작가는 이 히스테릭한 도시의 분열증 속을 헤매다 유럽에서의 유학 기간 내 겪어야 했던 인종차별을 통해 되려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깨닫는다. 오리엔탈리즘과 아시아 혐오가 동시에 공존하는 유럽에서 아시아 출신의 여성으로 자신의 인종과 젠더가 중첩된 마이너리티(Minority) 속을 허우적거리는 상황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부정하고 억압 했던 구조를 직면하게 된 것이다. 제국주의와 가부장 중심주의, 서구 종교가 피식민지를 착취하고 억압했던 사실로부터 그 구조의 날선 파생이 오늘날 우리가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고 있음을 말하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질문은 이제 외연을 넓혀 섬과 섬을 이으며 제3세계의 서발턴이자 생생한 증언자인 비백인들의 제자리를 되짚어 나간다.

작가는 통역 아르바이트를 위해 영어를 도구로 만난 아시아 태평양관의 제3세계 사람들로부터 정체성과 문화가 합일하는 자기 긍정을 대리 체험하였다. 그는 자신 안의 생동을 깨우쳐 주었던 존재들에 매료되어 도시 밖으로 걸어나간다. 작가가 스스로 체화하여 길어 올리는 것은 이미 말하고 있으나 구조적으로 들리지 않는 위치의 존재들이 내뿜는 생명의 이미지일 것이다. 작가는 그들과 공감하고 자신을 대입하며 이미 고착된 세계의 계급적 권위와 구조에 흠집을 내고 잠들지 않은 이계(異系)의 목소리를 전술하는 매개자가 된다. 그간 작가의 회화가 심해의 생물 같아 보이는 것들이나 그 생물 내부의 미토콘드리아 같은 세포의 이미지들을 촘촘히 짜인 그리드 위에 배치해 공상적 생태계를 구성해왔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 전시에서는 행위자로서 작가 자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빠르고 거칠게 이루어지는 시아노타입(cyanotype) 프린트 위로 중첩되는 동판화에는 그녀가 구축하고자 하는 자연과 젠더, 인종 등 모든 경계가 와해된 생명체들이 날카롭게 새겨진다.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동력을 불어 넣은 공간은 해양의 에너지로 가득 찬 세계로 향하는 길목과 같다. 
 안보미는 전시장을 우리를 억압하는 겉피가 벗겨진 장소로 삼아 그가 파괴하고 싶은 억압자에게 보란 듯이 이미 제자리에 있었으며 결코 지울 수 없는, 앞으로도 약동할 생령의 존재함을 세계의 구조를 꿰뚫어보려는 집요한 시선으로 증명해 내고자 한다. 미숙하고 원시적이며 열등한 것으로 치부되었지만 결코 맥을 끊어낼 수 없는 것, 일그러졌을지라도 다시 부활해 내는 서발턴들, 살아남은 비백인의 세계로 그것이 다수인 진실로 가는 그의 걸음은 성찰을 잊는 자들에게 우리의 근원과 다시 연결 되길 요청하며 억압에 반하는 자생적 존재로 우리가 자신의 자리에서 언제나 투명하고 진실 되기를 주문하고 있다.

이희경(시각예술작가)

서발턴(Subaltern)이란 단순히 하위주체나 하위계급을 의미하는 용어가 아니라 “전(全)지구상에 다양한 형태로 흩어져 있으며, 자본의 논리에 희생당하고 착취당하면서도 자본의 논리를 거슬러 갈 수 있는, 저항성을 갖는 주체”를 말한다. 이에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은 ‘세계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제3세계라는 공간적 조건과 계층적 하위성, 그리고 젠더 문제를 결합’하여 서발턴이란 개념을 재의미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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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4년 아트플러그 연수에서 열렸던 안보미 작가의 개인전 <제자리실향>의 전시서문을 의뢰 받아 작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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