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경 개인전 <바람의 속삭임> 전시 리뷰
2025.11.29 - 2026.1.10


"그녀들은 낯선 미래를 향해 걸어가"
Mereha melangkab menuju masa depan yang asing 1


글. 김강리 (독립기획자)


1. 
부탁받았다, A의 이야기를 잘 들어달라는. 나는 큰 고민 없이 A와 마주 앉았다. A는 인도네시아 파당 동굴 앞에 노점상을 차리고 음료수를 팔던 때에 그를 처음 만났다고 했다. (나와 이야기하는 동안, A는 그를 ‘미스터 코스모폴리탄’이라고 불렀다.) A는 목이 마른 듯 헐떡거리는 그에게 떼 보똘을 권했지만, 그는 예의라고는 조금도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생수병을 낚아챘다. 또 물값을 치르기는커녕 허튼소리만 늘어놓았고. 빈 대포와 맹세, 경계 없는 이동, 세계의 문 그리고 국제주의자의 열쇠……. 
나는 파당 동굴에 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파당 동굴은 일본군이 침략전쟁을 위해 아시아 전역에 파놓은 구멍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A에게 한국에도 비슷한 동굴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일본군이 남·서해안을 헤집어놓았으며, 제주도의 섯알오름에는 그 길이가 1km가 넘는 동굴도 있다고. 하지만 A는 시큰둥했다. 아마도 일본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다소 들뜬 사람처럼 보인 모양이다(이후 한국인으로서 갖는 역사적 감정이라며 해명해야 했다). A는 인도네시아에는 네덜란드군과 영국군이 뚫어놓은, ‘사람 잡아먹는 동굴’도 많다고 했다. 
시큰둥한 A의 표정에 나는 괜히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말수를 줄이고 조심히 듣기 시작했다. A는 그날도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이 손님을 기다리며 유튜브로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를 보고 있었다고 했다, 미스터 코스모폴리탄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제멋대로 마셔버린 물값은 아예 잊어버린 듯, 그는 지도를 한 장 건네주며 전 세계의 모든 동굴이 이어져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을 반신반의하던 A는 지도를 들고 동굴로 들어갔다. 먼저 해외로 떠나버린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손으로 만든 동굴들을 여행하던 A는 서 판관 설화가 떠올랐다고 했다. 동굴에 사는 큰 뱀은 처녀를 제물로 원했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용감한 서 판관이 보검으로 뱀을 무찔렀다는. 문득 처녀들이 정말로 뱀의 죽음을 원했을지 궁금해졌다. 정말 그 뱀이 처녀들을 잡아먹으려고 했을까? 오히려 처녀들에게는 마을로부터 멀어져 자유를 얻을 기회였을지도 모르지. A는 아마도 그들이 뱀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음식을 나누고 글과 그림을 배우며 이야기를 지었을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의 이야기 속 자신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2. 
이주 하는 인도네시아 여성을 뒤쫓는 이희경 개인전 《Desir Angin 바람의 속삭임》은, 지구적 무대에서 그들이 취하는 태도와 그들의 역사를 연결 지어 살펴볼 수 있도록 한다. 전시는 개별 작품의 장르적 특성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다소 직설적인 비유를 구사하는 영상 〈국제주의자의 열쇠〉(2025)는 숨죽이고 있는 드로잉과 설치 작업에 다가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이 글은 〈국제주의자의 열쇠〉와 그 배경을 먼저 살펴보고, 이를 단초로 삼아 전시를 조망하고자 한다. 
〈국제주의자의 열쇠〉에 등장하는 인도네시아 여성 A와 제국주의 미국을 의인화한 미스터 코스모폴리탄이 파당 동굴 앞에서 나눈 대화는 1960년대 인도네시아를 둘러싼 정세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스터 코스모폴리탄은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 당원과 관련 민중 단체를 대상으로 집단학살이 시작된 1965년을 언급하며, 자신이 “인디아나 존스”처럼 “뱀 같은 공산주의자”로부터 “세계의 평화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 나타났다고 말한다. 과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찰’을 자처하며 자국의 이익을 우선했던 미국다운 말이다.
작가는 “동굴의 끝에서 다른 동굴의 시작으로” 향하는 A의 독백을 통해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한다. 동굴을 여행하는 A는 제주 김녕사굴 설화를 서 판관이 아닌, 뱀에게 잡혀간다고 알려진 “처녀들”의 입장에서 되받아 쓴다. 이제 서 판관은 의협심에 불타 큰 뱀으로부터 마을을 구하기 위해 용기를 낸 영웅이 아니다. 서 판관은 공명심(功名心)으로 가득 차 영웅이 되기 위해 큰 뱀을 죽인 자이고, 큰 뱀은 처녀들이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도록 해방을 가져다준 존재이다.
A는 김녕사굴 설화에 곧바로 자신의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접붙인다. “뱀 같이 음란한 마녀들이 영웅을 죽였다. 악어의 구멍에서 /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할머니를 그렇게 불렀어.” 이는 서방 국가의 묵인과 지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던 수하르토 정권이 공산당을 색출하고 살해하는 과정에서 ‘그르와니(Gerwani, 1950-1965)’에 “성적으로 난잡한 춤을 추며 6명의 민족 영웅을 유혹해 살해했다”라며 씌운 누명과도 유사하다. 그르와니는 인도네시아 해방 이후 여성노동운동, 반성폭력운동, 문명퇴치운동 등을 전개했던 사회주의 여성운동단체로 한때 회원 규모가 이백만에 달했다.2 “옛날에 우리 할머니는 다른 여자들과 모여 공부도 하고 노래도 불렀대.”
동굴을 여행한 A는 인도네시아 부키팅기 동굴 앞에서 다시 노점상을 연다. 그 노점상으로 미스터 코스모폴리탄이 다시 찾아오지만, ‘좋은 거래”가 무엇인지 가르치며 그를 내쫓고는 미국으로 이주한 ‘나탈리 언니’에게 화상통화를 건다. 미스터 코스모폴리탄의 엉뚱한 말을 믿고 한국까지 갔었다며 짜증을 내는 A에게 나탈리 언니는 이렇게 말한다. “넌 이미 준비되어 있던 거지. 봐, 약간의 바람에도 멀리 날아갔잖아?” 1965년을 언급하며 미스터 코스모폴리탄이 “불 끄고 나면 뭘 해야 하는지 알아요? / 숨은 불씨부터 제거해야 해. / 작은 바람에도 언제든 다시 타오르니까.”라고 했지만,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불씨가 여기에서 또 저기로 날아간 것이다.
영상에 등장하는 소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Air Dunia〉(2025)는, 국제주의자의 열쇠로 세계의 문을 연 A의 궤적을 담고 있다. A가 떼 보똘을 팔던 가판대 위에는 인도네시아의 공산품, 돌과 식물 그리고 사진이 펼쳐져 있는데, 시선을 바닥으로 옮기면 미스터 코스모폴리탄으로부터 건네받은 지도의 토양 위에 마른풀이 천천히 왕복운동을 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로써 A가 자라난 인도네시아의 풍경과 약간의 바람에도 멀리 날아간 A를 영상의 속도에 벗어나 각자의 시간 속에서 돌아보게끔 한다. 
이때 〈밤이 걸어간다.〉(2025)는 “세계의 문”이고, 〈밤이 걸어간다. 2〉(2025)는 “국제주의자의 열쇠”이다. 〈밤이 걸어간다.〉는 동굴의 벽면과 야생의 식물을 탁본으로 떠낸 듯한 드로잉과 동굴의 안에서 밖을 바라본 시점에서 촬영된 사진 등을 콜라주한 작업으로, 이곳과 저곳을 잇는 통로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마치 오래된 해적의 지도처럼 보이는 〈밤이 걸어간다. 2〉는 개미굴처럼 얽힌 큰 줄기 위에 피사체를 짐작할 수 없는 청사진을 배치한 작업으로, 땅 밑으로 연결된 동굴들이 자아내는 풍경을 상상하게 한다.
《Desir Angin 바람의 속삭임》은 단순히 인도네시아 출신 여성 이주노동자를 보여주는 일에만 그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인도네시아의 근현대사를 하나하나 가르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이 전시는 거대한 몇몇 단어에 의존하기보다도, 전시장에서 마주하게 된 A의 말씨와 행동에 집중한다. 그리고 A의 유연하고 담대한 태도에 배어있는 인도네시아의 풍경과 역사를 우화적으로 풀어냄으로써, A를 길러낸 땅과 그 땅에 발붙인 이야기들, 그리고 이에 기반한 풍습에 다가간다. 

3.
A가 즐겨보던 〈섹스 앤 더 시티〉를 경제전문지 포보스는 “한 편의 영화나 문화 현상을 넘어선 하나의 산업”3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실제로 1990년대 미국의 언론인 캔디스 부시넬(Candace Bushnell, 1958-)이 ‘캐리’를 앞세워 30대 미혼 여성으로서 경험했던 뉴욕을 소재로 연재했던 칼럼 〈섹스 앤 더 시티〉는, 1998년 HBO에서 드라마로 제작된 이후 최근까지도 끊임없이 재소환되면서, ‘독립적이고 능력 있는 도회적 여성’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이를 선망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에 크게 일조했다. 
세련된 옷차림에 바쁜 걸음걸이로 전 세계의 대도시를 누비는 자유로운 캐리(들). 그러나 한편에는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캐리의 일로 취급되던 가사·돌봄노동을 대신하며 ‘코스모폴리탄’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다. 국제 인구 이동을 연구해온 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Saskia Sassen, 1947-)은 이러한 현상을 지구화에 따른 “생존의 여성화”라고 명명했다. 캐리는 여성 이주노동자를 수탈함으로써 노동자가 되고, 이주 여성노동자는 남성/여성, 중산층/하층, 백인/흑인 중 어느 한 집단에만 속한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한꺼번에 수행하면서 경계를 다시 그린다.
그러나 여성노동자의 이주가 기회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른바 ‘전통적’ 여성성이 무급의, 가족 기반 노동, 결혼, 모성과 연관되었던 반면, 초국가적 기업들이 요구하는 오늘날의 여성성은 임금노동자로서의 여성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한다. (중략) 가족의 둥지를 벗어나려는 이 같은 시도는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낳은 비정상적 현상으로 간주되곤 한다. 여성들의 신체적 독립이 점점 늘어나는 가운데, 이런 여성들은 종종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혐의를 낳았고, 많은 지역에서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와 성폭력의 급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4
그렇다면 지금/여기에서 A가 캐리가 즐기던 칵테일 ‘코스모폴리탄’을 거부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만 속한 감정이 아닐 것이다. A는 나탈리 언니에게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자폭 전술을 사용하기 위해 조직한 특공대와 같은 이름을 가진 칵테일 ‘가미카제’에 크랜베리 주스를 섞으면 ‘코스모폴리탄’이 된다며 이제는 마시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제국주의 침략을 상징하는 이름 가미카제와 누군가의 피를 연상시키는 크랜베리 주스의 합으로서 코스모폴리탄. 이는 과거의 침략전쟁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화 역시도 누군가의 죽음으로 뒷받침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국제주의자의 열쇠〉의 말미에서 A는 미스터 코스모폴리탄에게 “나 그 열쇠, 한국 가서 찾았어요. 찾아서 잘 쓰고 제자리에 두고 왔어요.”라고 말한다. 미스터 코스모폴리탄은 A가 열쇠를 찾았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았지만, 나는 A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A는 겁도 없이 동굴 속으로 걸어가 열쇠를 찾아냈을 것이다. 그 열쇠로 세계의 문을 열고 한참을 여행하다가, 그 열쇠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두고 왔을 것이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그 열쇠를 탐내던 사람들과는 사뭇 다르게. 나는 그렇게 믿는다. A를 길러낸 땅과 그 땅을 일궈낸 어머니와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낯선 미래를 향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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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의 제목은 〈국제주의자의 열쇠〉(2025)에서 A가 점점 더 깊은 동굴로 향해 걸어가며 읊조린 말에서 가져왔다.
2. 최형미, 「인도네시아 여성운동, 거르와니(Gerwani, 1950-1965) 안에 나타난 교차성의 정치학」, 『아시아여성연구』 58:2 (2019): 168-169.
3. Sex and The City is more than just a movie, or even a cultural phenomenon. It's an industry. Helen Coster, “In Pictures: Inside The 'Sex' Industry”, Forbes, May 22. 2008,  forbes.com/2008/05/22/twx-hbo-movies-biz-media-cz_hc_0522sexinc_slide.html (2025년 12월 13일 접속)
4.  칼라 프리먼,  「지구화」, 『젠더 스터디: 주요 개념과 쟁점』 , 캐서린 R. 스팀슨·길버트 허트 엮음 (후마니타스, 2024):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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