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내려앉는 사막, 동서남북은 토양의 흔적이 눈앞엔 끝없는 모랫바닥만이 펼쳐져 있다. 별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이때 별은 하나의 길잡이일 뿐이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별을 따라 걷는 것은 어딘가에 도착하지 않을 여정 속에서 뜻하지 않은 여로(旅路)와 마주할 그 순간을 고대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미셸 마페졸리(Michel Maffesoli, 1944~)에 따르면 인간은 무작정 다른곳으로 떠나고자 하는 '방랑'의 욕구를 본성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정착'이 인간 삶의 근간이 되는 절대적인 가치로 존재하는 것에 따라 이 욕구는 억압되게 되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건립하기를 입구 정주(定住) 사회에서 유목민은 난 사회의 경계를 망치고 반역자이자, 탈선자일놈이다. 그러나 고을 발전으로 확보된 '이동성'은 방랑에 대해 억압된 본성을 불러내었고, 점차 건설되는 현대인의 유목화는 비선형적으로 부유하는 등이 영원한 입지를 갖지 못한다. 

노마디즘은 심장이 없어져도 어떠한 것도 보장되지 않는데, 안타깝게도 사회의 새로운 인식은 패러다임입니다. 동시에 정주사회에서 유목사회로 급변하는 사회구조와 새로운 환경 적응하기 위해 우리가 택한 생존방식이기도 하다. 세계의 수요로부터 예술의 파이프를 둘러싼 낸시 노마드 예술가는 암시와 예상치 못한 탐험을 하며 자신의 파이프를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시킨다. 미술 작품 그 자체도 더 이상 완결된 지형이 아니라 연속된 한순간으로, 한 궤적에 놓인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이어서 '봉합 지점'이 된다.

별을 따라 움직이는 유목민은 당신에게 길을 만들어주며 걸어간다. 각자 다른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이들은 점(點)에 머물기도 하며, 때로는 선(線)상에서 이동하면 무한한 가능성에 스스로를 내맡긴다. 규칙적이면서도 변덕스러운 발걸음은 삶의 측면에서 금지되고 주체적인 탐험에 대한 열정이 서려있습니다. 본 전시는 모래와 별 사이를 계속해서 유랑하는 노마드 아티스트의 일정으로 초대하여 그 긴 시간 동안 함께 걸어보기를 제안한다.



방향이 의미를 잃은 사막의 어둠 속에서, 광활한 황무지가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다. 여기서 우리는 오로지 우리 머리 위의 하늘을 장식하는 별들에 의지한다. 하지만 이 별들은 단지 안내자일 뿐, 우리의 목적지를 비추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별들을 따라가며, 어쩌면 끝없는 여정 속에서 예상치 못한 '여행자의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순간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마페솔리(1944~)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방랑'에 대한 욕망, 즉 미지의 세계로 목적 없이 모험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착'이라는 현대적 이상이 인간 삶의 절대적 가치로 여겨지면서 이 욕망은 억압되었다. 주어진 것에 대한 고수를 요구하는 정주 사회에서 유목민은 사회적 규범에 도전하는 반항아나 변절자로 여겨진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은 억압되었던 방랑 본능을 되살렸고, 현대인의 유목민적 삶이 가속화되면서 영원한 정착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 

유목민은 중심이 없는 사회에서 새로운 틀과 패러다임이 되고,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고 불안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새로운 틀과 패러다임이 됩니다. 또한 정착 사회에서 유목민 사회로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구조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생존 전략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불안정성에 힘입어 유목민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상징과 형태를 탐구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창조하고 변형합니다. 예술 작품은 더 이상 완성된 사물이 아니라 연속적인 순간 속에서 다양한 에피소드를 연결하는 스티칭 포인트가 됩니다.

별을 따라가는 유목민들은 걸으며 자신의 길을 만듭니다. 각 개인은 다른 목적지로 향하며 때로는 지점에서 멈추고, 때로는 선을 따라 움직이며 무한한 가능성에 자신을 맡깁니다. 규칙적이거나 변덕스러운 각 단계는 삶에 대한 적극적이고 주관적인 탐구에 대한 열정을 반영합니다. 이 전시는 모래와 별 사이를 계속 헤매는 유목민 예술가들의 여정에 동참하도록 초대하며, 그 아래를 함께 걸을 것을 제안합니다.




협력: 홍익대학교/ Beaux-Arts de Paris
기획: 미술학과 전시기획 콜렉티브 ACHT 
강규현, 김민지, 김해린, 박세진, 이나경, 정서현, 지고후, 한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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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1986, 대한민국 의령)은 한국 사회에 정주 중인 아시아 이주민들의 삶과 배경을 리서치 하며 영상과 드로잉 등을 매체로 작품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개인의 미시사에 잠재 된 문화. 역사 등의 배경과 도착지의 여러 사회적 레이어로 형성 되는 이주 당사자의 다층적인 정체성의 구현 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구도심에 형성 되는 이주민 식당을 다니며 한국사회의 빈공간을 메우는 이주민의 존재를 인식하고 만남과 교류에 중심을 둔 작업을 전개하였다. 이주여성들이 구현하는 일상의 현실과 과거 존재 그러나 여전히 유효한 존재들 사이를 오가며 작가는 공동체의 미래에 질문한다.

“멀리 가고 싶었지, 행복해질 자신을 가지고”

<회차시간>은 한국에서 타향살이를 시작한 인도네시아 출신 아나가 목적지 없이 버스에 올라타 종점을 지나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온 방황의 경험을 토대로 한다. 그녀는 1997년 한국으로 이주해 자녀들을 키우며 로컬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의 레지던시에 입주하였던 이희경은 이주 노동자들의 삶을 가시화하는 작업을 이어 나가며 아나와 인연을 맺게 된다. 작가는 무슬림인 아나처럼 질밥(jilbab, 히잡의 인도네시아식 명칭)을 쓰고 그녀가 해준 이야기를 따라 낯선 도시에서 무작정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렇게 작가는 아나의 정체성을 둘러 입고 그녀의 행적을 따라가본다. <산책>은 이주의 경로로 장소에 대한 이희경의 사유와 4명의 이주여성의 인터뷰를 각색한 영상이다. 산책의 첫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우연히 촬영한 사람으로 자카르타에서 반둥으로 가는 평범한 승객이다. 작가는 기차 앞좌석의 인물을 보며 여성들의 말들을 떠올리며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있을 것이라고 떠올렸다. <회차시간>과 <산책>은 장소와 장소 사이, 이동의 과정에 있는 시간을 보여준다. 영상은 이주민들이 노동을 수행하는 과정을 담아낸 것이 아니다. 이동하는 버스, 기차안에 몸을 싣고 사색하는 이의 의식의 흐름을 드러낸다. 이는 현실에서 잠시 물러난 사색의 과정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방랑¹의 시간이다. 여기서 이들은 모험을 통한 자아의 발견 (Retrouver le soi à travers de l`aventure) ²’을 수행한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타자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아나도 이와 같이 필연적으로 자신의 이질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서로가 낯선 이곳에서 이질적인 정체성은 가시화되며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된다. 방랑을 통해 경험하게 되는 타자와의 만남은 개인의 영역을 확대시킨다. 새롭게 생성된 영역에서의 개인적인 경험은 또 다른 자아 정체성의 발현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타자는 이 방랑에서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시키고 확장시키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정지된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고 무한에 대한 응시와 걷기를 통해, 또 다른 생성된 자아로 옮겨 가는 것이 방랑이 주는 결과이다. 경계를 건너온 아나는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 가능하도록 변환하고 와해하도록 내몰려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가 규정지은 ‘이주민’의 틀은 그녀의 전부를 대변하지 못한다. 공공의 장에서 배제되거나 가시화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그녀는 장소에 존재하며 자신을 그곳에 확장한다. 이곳은 동시에 이주자로부터 선택 된 장소이기도 하다. 아나는 이주의 문을 열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하며 다원적인 주체가 된다. 이주민인 동시에 주체적인 ‘유목민’이다. 우리는 그녀가 지닌 유연한 사고와 삶을 영위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부터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세계로 나아가는 방법을 엿보고 용기를 얻는다.
아나와 같은 이주민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들의 선택권을 행사하여 그 광활한 사막에 자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외부적 요인들이 그들의 선택을 강제했다고 보는 편이 설득력있다. 외부환경으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노마드의 삶인 것이다. 이주민의 삶 속엔 비애 섞인 합리화와 불안감, 그리움이 내재되어 있다. 영상 속 자막은 되려, 자신의 삶이 나름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안타까운 독백에 가깝다. 이희경은 이 불안정한 부표 같은 삶에서 더 나은 삶을 향한 이주를 하고 그 이주의 경험은 개인이 내제하는 장소 개념을 세계로 확장하지만 사실 글로벌 자본주의 체인망-식민 경제의 루트를 따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삶을 긍정하며 환대한다. 타자와의 접속이 필수 불가결한 방랑에서 타자에 대한 열려 있음과 환대는 방랑적 경험의 필수 요소가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 간 비위계적 관계의 그물망을 연결해주는 것은 ‘감정적 공유’를 통한 ‘융해³’이다.

글: 김해린 Harine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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