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을 부를 때> :
현재와 과거 그리고 여기와 거기를 잇는 감각을 되찾기

 이희경 개인전 <너의 이름을 부를 때>는 작가의 세계가 지금 여기에서 출발해 생각지 못한 시공간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다. 지난 두 차례의 개인전과 레지던시 입주작가전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이주민의 삶과 그들을 둘러싼 풍경을 탐구하고 시각화해온 이희경은 이번에도 그 질문을 이어간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그 질문은 예기치 못한 시공간으로 향하고 그  결과 훌쩍 확장된 작가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회차 시간>2020년대 한국에서
전시장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관객을 맞는 것은 흑백의 단채널 비디오 설치작품 <회차 시간Time to Return, Jam Kembali>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주인공이자 협업자이며 모든 것의 시작이자 동기라고 할 수 있는 아나 ‘언니’와 만나게 된다. 1970년대 후반 인도네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1990년대 후반에 한국으로 이주해 지금은 대전에서 자녀들을 키우며 인도네시아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그 식당에서 이주민의 삶을 관찰하면서 작가는 아나와 인연을 맺고 그를 알아가면서 한국사회가 규정지은 이주여성이라는 틀로는 결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회차 시간> 은 작가가 아나를 이해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잠시나마 아나가 ‘되어보기’로 한 시도이기도 하다. 무슬림인 아나처럼 질밥(jilbab, 히잡의 인도네시아식 명칭)을 쓰고 아나가 해준 이야기를 따라 낯선 도시 대전에서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와보기로 한 것이다. 이 짧은 여정에서 모은 이미지와 비디오에 아나의 이야기를 토대로 재구성한 자막과 내래이션이 입혀져  <회차 시간>이 되었다. 이 작품을 보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버스 안에서 아나의 존재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거나 위아래로 훑는 시선과 수근거리는 목소리를 상상하며 한국 생활 초기 아나가 피할 수 없었던 고독과 소외감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아나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에 대한 소망까지 엿볼 수 있다. 화면을 꽉 채운 자막과 내래이션은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 사이를 오가며, 질문하고 더 알아보려고 파고드는 작가과 그에 조응하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독백하며  아나의 관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여정의 주체는 작가이지만 이 영상에서 목소리를 드러내는 사람은 아나다.  아나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그런 그를 통해 작가는 한국 사회가 타자를 대할 때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약점과 텅 빈 지점을 포착한다. 어쩌면 다른 존재를 마주할 때만 발견할 수 있는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 지점에 매혹된다. 더 나아가 그 매혹의 근원이 무엇인지 파헤쳐보기로 한다. 그러다가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사건으로 빨려들어간다.

<잔상> 1960년대 인도네시아로
그렇게 가닿은 곳은  전시장 전면의 벽 전체를 차지한 2채널 비디오 설치작품  <잔상 Afterimage, Bayangan>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절반쯤을 구성하는1965년 해체된 인도네시아의 여성단체 ‘그르와니Gerwani’에 관한 파운드푸티지와 아카이브 이미지가 바로 그것인데, 작품과 전시장에 비치된 자료들이 이 단체에 대한 배경지식을 제공하고 있지만 한국어 관련 정보는 드물고 있다 해도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으므로 배경 설명을 덧붙여보기로 하자. 그르와니는 그라칸 와니타 인도네시아Gerakan Wanita Indonesia 곧 ‘인도네시아 여성 운동’의 줄임말이다.  1950년 결성 이래 가부장제에 맞서 여성 의제를 실현하기 위해 왕성하게 활동했고 최전성기였던 1960년대 초에는 회원 수 150만 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여성조직으로 성장했다. 인도네시아가 독립 이후 수카르노의 지휘 아래 반제국주의를 내걸고 반둥회의를 개최하고 비동맹운동의 맹주로 활약하던 시절의 일이다. 그러나 1965년 9월 30일 친공산주의 쿠데타 실패로 벌어진 공산주의자 대학살에 휘말리면서 그르와니는 오명과 낙인의 이름이 되었다. 특히 9월 30일 밤, 그르와니 회원들이 납치살해된 장군들의 시신을 강간하고 그들의 성기를 잘라 들고 춤을 췄다는 루머가 결정적이었다. 이 거짓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가자 이미 누적되어 온 이슬람 세력과 반공 보수주의자들의 적대는 순식간에 폭력으로 불붙었다.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들을 대상으로 한 학살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희생자 수가 50만에서 최대 100만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거대한 폭력은 아주  최근까지도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2012년 국내에서도 개봉한 <액트 오브 킬링>이 이 사건을 바깥 세계에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고, 전시가 열리던 중인 2023년 1월에는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이 사건을 포함한 국가의 인권침해 사건 12건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아나가 온 낯선 아시아 국가의 근현대사에서 “일부다처제, 강제결혼, 매춘과 이중 노동의 폐지”로 “독립의 완전한 정의”를 쟁취하고자 전투적으로 싸운 세계 최대 규모 여성단체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작가는 자연스럽게 아나와 그의 용기와 꼿꼿함을 떠올리고 또 연결짓고 싶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나의 경로는 어떤 면에서 그르와니가 해체되고 악마화된 과정이 인도네시아 사회에 오랫동안 미친 효과와 더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1965년 폭력의 폐허 위에 세워진 ‘신질서’ 수하르토 정권은 학살의 기억이 흐릿해질 즈음 의도적으로 다시 이 기억을 불러냈다. 1984년 프로파간다 영화 <9월 30일의 배신>을 제작해 해마다 TV에서 방영하고 학생들은 영화관에서 의무적으로 관람하도록 한 것이다. (<잔상>에도 잠시 등장하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면도날의 클로즈업과 여성들이 춤추는 장면을 교차편집해 문제의 거짓소문을 노골적으로 암시한 대목인데,  이 장면은 에로틱한 상상력과 결합해 인도네시아인의 뇌리에 강력하게 박혀 집단기억의 일부가 되었다. 이 집단기억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공적 공간에서 여성의 목소리 특히 노동계급 페미니스트의 목소리를 아주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지워버렸다는 점이다.  1960년대 후반 인도네시아는 다시 빠른 속도로 글로벌 공급망에 편입되고 세계시장에 자원과 노동력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가 세계시장에 내놓은 것 중 하나는 값싼 여성노동력이었다.(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의 70퍼센트 이상이 여성이며 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홍콩, 중동지역 국가 등에서 저임금의 가사노동자로 일한다.) 아나는 학창시절 해마다 이 프로파간다 영화를 의무관람한 세대의 일원이자 ‘세계화의 하인’으로 ‘이주의 여성화’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동참해 먼저 중동에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향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노동이주의 이면에는 언제나 그들이 떠나온 곳의 폐허가 있다면 아나가 떠나온 곳의 폐허는 그르와니의 오명일지 모르겠다. 노동과 경제 관련 여성 의제가 실현되지 못한 채 노동계급 여성의 목소리가 지워진 주변부 국가에서 여성은 가장 먼저 근원적 축적의 도구이자 자원으로 내몰리기 때문이다.
<잔상>의 나머지 절반은 작가가 수집하고 기록한 대전 지역 인도네시아 이주 여성들의 일상과 그들 주변의 풍경이다. 기존 거주자들이 새로 개발한 신도심으로 떠난 후 버려지다시피한 원도심은 이제 이주민과 식물의 공간이 되었다. 아시아 각국의 언어로 된 간판들 바로 뒤편에는 나무가 벽을 뚫고 자라고 덩굴식물이 쓰러져가는 집을 뒤덮고 있다. 서울 사람들이 “지방 소멸의 풍경”쯤으로 낭만화 혹은 타자화되는 이 공간에 이주민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사원을 짓고 함께 모여 기도하고 음식을 나눠 먹으며 이전에는 없던 세계를 창조해냈다. 아시아 식당이 들어서고, 식당에 이주민들이 모여들며, 그곳들을 중심으로 할랄 음식을 파는 범무슬림 네트워크가 형성되기도 한다. 여기에 지자체는 ‘도시재생’을 표방하며 각종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해  불안정성이 곧 삶의 조건인 젊은 예술가들을 불러들인다. (작가 또한 그렇게 대전에 다다른 예술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잔상>에 나란히 병치된 1960년대의 그르와니 관련 파운드푸티지과 2020년대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대전의 풍경은,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두 시공간 사이를 점프하듯 오가며  스스로에게 나는 어디쯤 걸쳐있는지 계속 질문하게 한다. 때론 자막이 이 풍경과 이미지는 나와 얼마나 멀리 혹은 가까이, 얼마나 강력하게 혹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가늠하도록 도와준다. 작가가 인터넷에서 긁어모은 과거의 문구들은 인도네시아어-한국어의 거친 AI 번역을 통과해 “시간을 거치며 빛바래고 삭아버린 언어”(나는 이 표현을 친구 소영에게서 훔쳐왔다)처럼 보이고, 작가가 새로 쓴 자막의 문구들은 이 작업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일러준다. “과거의 잔상이 우리에게 미래로 가는 법을 알려줄 것이다.”

<역사>여성의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
<잔상>에서 고개를 돌려 왼편을 바라보면 벽에 걸린 흑백의 드로잉이 보인다. 걸개그림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작품 <역사>는 그르와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싸워온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이미지를 한데 배치한 것이다. 이 작품에는 아래부터 1950-60년대의 크바야와 사롱 차림에 선글라스를 낀  그르와니 활동가들, 1993년 노조를 조직하다 잔혹하게 살해된 24세의 여성 노동자 마르시나, 1998년 IMF가 인도네시아를 강타한 후 개혁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어머니들, 민주화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맞서 싸우는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이 차례로 담겨있다. 레퍼런스 없이 이 모두를 알아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하단에서부터 시간순으로 배치된 이 싸우는 여성들의 모습에서우리는  좀 더 뚜렷하게 독립 이후 아시아 신생국이 거쳐간 공통의 역사를 추적해볼 수 있다. 여성들은 민족해방을 위해 함께 싸우고 독립한 새로운 국가에서 여성해방을 요구하지만 종국에는문화적 보수주의에 밀려나 공적 공간에서 밀려나거나 들러리로 전락한다. 그 사이 신생국의 정치적 도전은 좌절하고 신국제분업 안으로 통합되며 그 결과  1970년대 이후 저발전국의 여성 노동은 섬유, 전자 분야의 “순종적이고 민첩한 손”을 가진 노동력으로 ‘재발견’된다. 이 경로를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체계적으로 따라 자본을 축적한 나라 중 하나인 한국은 1987년 민주화 이후 국내 임금이 상승하자 이 분야 제조공장을 후발주자인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본토 등지로 재배치했다. 그렇게 1990년대 초반에 세워진  인도네시아의 섬유신발 공장에서는 한국식 노무관리에 반말하는 쟁의가 연달아 일어났다. (마르시나는 그런 정치경제적 분위기에서 노조를 조직하던 여성 노동자였다.) 어렵게 민주화를 이루어내지만 정치적 민주화가 반드시 경제적 민주화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노동의 유연화으로 인한 불안정한 노동은 특히 여성의 운명이 된다.
그러나 그 고비고비마다 여성들은 싸웠고 패배했을지라도 살아남아 망각에 저항한다. 그렇게나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살아남은 그르와니 생존자들은 합창단 디알리타Dialta을 조직해 자신들이 수용소에서 만든 노래를 부르며 과거를 증언한다. 나는 그들에게서 1970년대 청계피복노조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미싱타는 여자들>(2020)의 주인공들이 <흔들리지 않게>를 부르는 장면을 겹쳐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아시아 여성 공통의 과거를 기억하며 지금의 우리와 연결하는 낯설고 지난한 작업 없이 우리는 결코 “미래로 가는 법”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역사는 알게 모르게 지금의 우리를 엮어낸 씨실과 날실이며 우리 모두는 ‘과거와의 연루implication’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와의 연루는 역사적 책임과는 조금 다르다. 과거사가 내가 직접 저지른 일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에 따른 모종의 이익이나 피해에 얽혀있고 그 행위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감각에 관한 것이다.  <너의 이름을 부를 때>는 한국사회에서 이주민과의 만남에서 시작해 그런 감각을 찾아나가는 여정에 관한 전시다. 충실하게 기록(만)하기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하게 미지의 시공간과 부딪히며 세계의 바운더리를 넓혀갈 때 시각예술 작가는 어떤 충돌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업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희경의 세계가 어디까지 넓어질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떤 충돌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그 행보가 자못 궁금해지는 것이다.

글.박소현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