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에는 어떤 역사 어떤 형태가 있다.
It has a history(s) a form(s).


옛날 옛날에, 1970년대 인천미술협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여성작가들이 인천여류작가회(1982)로 모여 인천여류작가연합회(1996)를 설립했다. 이들은 2004년 ‘사단법인 인천여성작가연합회’를 조직하고 협회의 연례행사를 확대한 제 1회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2004)를 열었다. 이렇게 출발한 행사는 ‘비엔날레’로서 내실을 다진 2006년 Pre-비엔날레를 지나 2007년, 2009년, 2011년 총 3회를 지낸 이후 막을 내린다. Pre-비엔날레를 미러링했던 《男성미술비웃날레》(2006) 주최 측은 이 행사의 존폐 논란이 끊임없이 오가던 마지막 해에 좌담회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 무엇을 남겼나?」를 열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존의 거대 미술 행사의 대안을 제시하는 비엔날레가 아닌 단지 ‘여성’으로 모인 집단이라는 점과 지역사회의 공론화 과정 없이 대표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행사임을 들어 이를 폐지해야 한다고 논한다. 이러한 비판과 맞물린 정권 교체로 예산이 삭감된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는 국제적 성격과 관심을 잃고, 이야기는 서서히 자취를 감춘다.
실종된 행사의 영문명 앞에 ‘Post’를 내건 전시 《침묵의 도면》은 실종 이후 흩어진 방대한 자료를 뒤쫓다 마주한 단절된 관계들과 텅 빈 정적 사이를 방황하며 시작했다. 지역사회 예술인의 반발과 중앙의 외면, 정치에 의해 쉽게 휘둘리는 미술계 내 공적 자본은 이해관계의 충돌 안에서 속할 자리를 찾아가는 다른 미술 행사와 달리 이 비엔날레가 특히나 많은 비판과 외면을 받고 ‘무엇’을 남길 새 없이 사라지게 된 이유가 되었다. 지난한 충돌과 무관심 속에 역사로 선별되지 못하고 잊힌 사건을 상상하는 전시장에 서서 다시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기억되고 무엇이 잊히는가? 이곳에 누가 언어를 가지고 있고 누가 그렇지 않은가?
짝짝짝. 송유나의 〈축하 기념 박수 화분 1호〉가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온 관람자를 열렬한 환호의 박수로 맞이한다. 그는 Pre-비엔날레에 달라붙어 의도를 비틀고자 했던 《男성미술비웃날레》를 무형의 숙주 삼아 다시 기생을 시도하여 실종된 이야기를 전시장으로 불러온다. 경박한 박수가 만들어 낸 소란은 언어를 갖지 못한 침묵을 깨고, 《男성미술비웃날레》가 질식시키고자 했던 제도지향적 욕망이 이곳에 여전히 남아있음을 ‘비웃’으면서도 그 뒤에 어딘가 씁쓸한 그림자를 남긴다. 열을 맞춰 걸린 〈축하 기념 액자 A4 (투명)/벽걸이〉는 마치 새벽배송으로 오늘 아침 전시장에 황급히 도착한 듯 보인다. 이들은 조악한 잔해마저 환대의 제스처로 위태롭게 감싸 안는 동시에 있어야 할 장소를 상실하고 떠도는 것들을 위한 임시 거처를 마련한다.
김샨탈은 송유나가 비워둔 자리에 증언할 이들이 사라져가는 이야기를 흘려보내, 사건의 바깥으로 서서히 우리를 안내한다. 기억 저편에서 넘어온 지워진 이름과 세계, 충돌에서 발생한 목소리, 정의되지 않은 비공식적 언어 파투아(patois)에 관한 거짓 전설은 소리로 뱉어지는 동시에 필연적으로 사라진다. 그렇기에 사라짐은 역설적으로 소리가 이곳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활자로 기록한 역사가 아닌 말해진 사건으로서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서로의 전개에 개입하고 누적을 이룬다. 〈타비〉는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설화처럼 공기 중에 떠도는 속삭임을 전시장 곳곳에 얼룩으로 남긴다. 벽 한편에 놓인 집음기를 들고 몸을 움직여 흩어지는 음성을 잠시나마 포착할 수 있겠으나 이를 거머쥘 방도는 없다.
그래서 이희경의 〈잔상〉은 수집한 자료와 증언할 이들이 사라진 뒤에도 분명히 여기에 벌어졌던 사건의 자국 그리고 여전히 “더 나은 삶”을 위해 끈질기게 살아가는 바깥의 생을 포착한다. 〈타비〉의 화자가 앞장서 안내한 이야기의 외부에서, 우리는 1960년대 성적 비방과 정치적 탄압에 의해 역사에서 지워진 인도네시아 여성주의 운동 ‘그르와니(Gerwani)’를 마주한다.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닿은 이미지와 작가가 만난 인도네시아 이주 여성의 일상이 나란히 놓이거나 겹쳐지며 드러나는 풍경은 사라진 기록 앞에 선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과거의 잔상이 우리에게 미래로 가는 법을 알려줄 것”이라고. 그렇게 전시장 바깥에서 바라보는 〈역사〉는 단일한 주체가 기술한 역사와 다른 ‘복수의 역사’를 유실된 기록의 빈틈 안에 바로 세운다.
이번 전시는 단 하나의 사건을 지나치게 낭만화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각자가 제도와 권력에 편입하기 위해 내달리는 동안 곁에서 결국 누락되고 지워진 일들을 길어 올리고자 하는 시도로 자리한다. ‘여성’을 내걸었던 비엔날레가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 대안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해를 거듭할수록 참여자들 사이에 형성되고 있던 연대감, 여러 문화권의 여성작가들이 모이는 장으로서 기능했다는 점과 공적 자본에서 조금씩 멀어지기 위한 자생적 방안을 고민한 흔적. 사라진 행사가 이곳에 남기고자 했던 ‘무엇’을 뒤따라간 시작은 마침내 무엇이 기억되고 무엇이 잊힐지, 누가 언어를 움켜쥐고 있는지 끊임없이 판단하는 사회에서 선명하게 존재했지만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 자취를 감춘 이야기를 시야에 ‘보이도록’ 하는 일이 되었다. 이 전시 또한 옛날이야기처럼 결국 흩어지고 말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목격한 전시의 잔상(afterimage)은 관람자의 기억 저편 어딘가에 남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잊곤 한다. 손에 거머쥘 새 없이 사라지는 소리도 관습적 언어로 남지 못한 비명도 사실 누군가 진동한 힘에 의해 세상에 내뱉어진 것임을. ‘어떤 형태’를 얻지 못하고 흘러간 ‘역사들’은 결국 어딘가에 쌓여 우연한 계기로 다시 돌아올 것임을 말이다. 이러한 계기들이 우리 앞에 더욱 자주 찾아올 수 있도록, 구부러진 길 사이 때로는 서로를 잃고 주저앉더라도 뒤이어 오고 있는 이를 위한 크고 작은 단서들을 곳곳에 남길 사람들의 공모를 제안한다. [ ]


큐레이터 박이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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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History>, 133 x 214 cm, 캔버스천 위에 콘테, 2022

<잔상 Bayangan>, 2채널 영상, 사운드, 00:18:37, 2022



[침묵의 도면 Cartographies of Silence]

기간 | 2023.09.05. 화 – 09.23. 토
시간 | 13:00 – 19:00, 월 휴관
장소 | 임시공간 @spaceimsi

작가 | 김샨탈, 송유나, 이희경 
기획 | 박이슬
진행 | 남현정
그래픽 디자인 | 수퍼샐러드스터프
사진 | 조신형 (Visualog)
미디어 장비 및 설치 | 올미디어

주최 | 임시공간
후원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창작산실 공간지원

오시는 길 |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23번길 48. 1층

Sep 5 – 23, 2023
Tue – Sun, 1 – 7 p.m.

Artist : Shantal Jeewon Kim, Yuna Song, Heekyung Lee
Curator : Yiseul Park
Coordinator : Hyunjung Nam
Graphic Design : SUPERSALADSTUFF
Photo : Shinhyung Jo (Visualog)
Media Installation : all-media

Hosted by space imsi
Supported by Arts Counci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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